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아편전쟁 (문단 편집) === 대응: [[임칙서]]의 파견 === || [[파일:attachment/아편전쟁/1234.jpg|width=250]] || || '''청나라의 마지막 명신''' ||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려 있고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 >---- >― 1839년 임칙서, 광동으로 출발하기 직전 1837년에 임칙서는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재임하면서 농업·상업을 개혁하고, [[아편]]을 강력히 단속하고 민간 자율을 존중하며 매우 높은 실적을 내고 있었다. 당시 임칙서는 엄금론을 내세워 아편을 강력히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정책과 그 세부사항까지 이미 마련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는 전도유망하던 형이 [[아편]] 중독으로 목숨을 잃은 것을 계기로 아편을 적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임칙서는 공자진[* [[청나라]]의 사상가.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사회 기강을 이완할 것을 주장하고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경고했다. 공자진의 시 기해잡시(己亥雜詩)의 125(혹은 220번째 수)는 청 말기의 혼란상을 논할 때 종종 인용된다.]과 교류하여 경세론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때문에 아편의 존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임칙서는 "법을 지키는 것보다 법을 만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입법의 실효성을 따지기 전에 우선은 근본적인 입법 의도를 생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은 곧 이금론을 향한 도전이었다. 이금론의 논리대로라면 천자의 아편중독자는 천자의 교화를 포기하는 게 마땅했지만, 임칙서는 "모든 백성이 동등한데 어떻게 흡연한 자라고 하여 버려야 하는가?" 라고 일갈했다. 임칙서의 이런 강경한 태도와 그가 제시한 아편 단속 정책에 설득된 도광제는 마침내 아편 무역을 작살내기로 결심한다. 1838년 12월 31일,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 청에서 특정한 일에 전권을 위임하는 임시 벼슬. 3품 이상은 흠차대신. 이하는 흠차관원이라 한다.]과 광동수사로 삼았다. 실은 임칙서가 광동에 내려오기 전 '''아편 무역은 이미 고사 직전이었다.''' [[도광제]]는 등정정을 시켜 아편 단속을 강화할 것을 명령한 상태였다. 이에 1839년 5월에서 9월까지 아편 무역 금령은 일시로 해제되었는데 이것이 근본이 되는 해제로 예측한 상인들과 아편을 무리하게 비축한 서양 상인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상인들은 아편의 가격을 매우 낮추어 처분하려 했지만 등정정의 강력한 조치로 말미암아 그것도 무리였고 결국 1840년이 시작될 무렵에 아편 무역은 이미 종언을 고한 상태였다. 1839년 3월 10일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아편의 폐해를 다스리지 못하면 광동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임칙서는 강력한 [[아편]] 단속을 실시하여 아편 금지령을 위반한 1,600명을 체포하고, 아편 2만 8천근을 몰수하였으며 부패한 관리들도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천하의 임칙서도 외국인 밀수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임칙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Emer_de_Vattel|에머리히테 바텔]]이 쓴 <국제 법(Law of Nation)>을 입수해 그것을 한역하고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이 문제에 간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와는 별도로 임칙서는 아편 문제만큼은 양보할 생각도 타협할 의지도 전무했다. 그리고 3월 18일에 영국 상인들에게 3일 내에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했고, 아편 무역을 재개할 시에는 상품 몰수는 물론이고 사형까지도 감수할 수 있다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대신, 임칙서는 아편 1상자당 차 5근을 줄 것을 약속했으나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실질로 몰수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3월 21일이 지나자 임칙서는 공행의 상인 2명을 즉시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영국 상인들은 아편 1,036 상자를 자발적으로 넘겼으나, 임칙서는 그 상인들이 아편 20,000 상자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공행의 상인은 체포되었고 임칙서는 3월 24일 병사들을 동원해 공행 내에 있는 영국 상관을 포위하였고 중국 하인들을 철수하게 했다. 포위한지 6주가 지나자 영국 관리였던 찰스 엘리엇은 상인들에게 아편의 소유권을 [[영국 정부]]에 양도하면 정부에서 피해를 보상해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 다음 엘리엇은 양도 문서를 작성해 임칙서에게 전달했다.[* 즉, 청나라 자체의 행정 집행을 양국 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하게 하겠다는 얄팍한 속셈이면서 향후 [[영국 정부]]가 아편을 보상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마침내 5월 16일 영국 상인들은 아편 21,306 상자(약 1,425톤)를 임칙서에게 양도하였다. || [[파일:attachment/아편전쟁/Exame.jpg]] || || 호문소연(虎門銷煙). || 임칙서는 이 아편을 [[베이징]]으로 운송하여 아편 단속의 성과를 알리고 싶었지만 운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운송 중에 일부가 빼돌려져 단속이 무색해질 위험성도 있었다. 결국 [[청나라]] 정부는 현지에서 폐기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아편]]을 다시 사용하지 못하도록 바닷물과 [[생석회]]를 섞은 열[* 생석회가 물과 접촉하면 발열 반응으로 끓어오르는데 아편은 열에 약하다.]을 가하는 방법을 쓰기로 결정한다. 아편 폐기는 6월 3일에서 6월 25일까지 지속되었다. 아편을 폐기처분하기에 앞서 임칙서는 토지신과 해신에 사죄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거대한 웅덩이를 파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뚝을 쌓아 인공 제방을 만들었다. 그 다음 그 속에 아편과 생석회를 넣어 잘 섞고 통째로 바다에 되돌려보냈다. 이때 연금에서 풀려난 [[영국인]]들은 [[마카오]]로 도주한 상태여서 그 광경을 지켜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제외한 모든 교역을 지속해 나아갈 생각이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엘리엇은 크게 화를 내며 모든 상인들을 철수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이 의사를 [[미국]]에도 타진했으며 미국 상인들은 임칙서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편 무역을 철폐했다.[* 당시 미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만든 아편을 취급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 상인들만 엘리엇의 강요에 따라 강동에서 떠났다. 이윽고 영국 상인들은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아편 무역은 님들 사정임. 그리고 청나라가 아편 무역 금지했는데 우리가 왜 신경 써야 됨?"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1839년 7월 12일, 광둥을 떠나 [[주룽 반도]]에 정박했을 때 술에 취한 [[영국 해군]] 수병 2명이 [[중국인]] 농부 임유희(林維喜)와 시비가 붙어 그를 폭행하고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엘리엇과 [[영국인]]들은 해당 수병 2명을 체포하여 본국의 군 교도소로 보내며 벌금을 물리고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치외법권을 발동하게 하는 선에서 사건을 호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칙서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는 주권침해라고 반발하며 영국인들에게 임유희를 살해한 사람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영국인들은 임유희를 살해한 살인범을 인도하지 않고 "영국의 법률에는 외국에서의 죄를 저질렀을 때를 대상으로 한 법이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임칙서는 영국 법을 가져와 그들 눈앞에 들이대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상술했듯 임칙서는 광둥에 부임하자마자 영자 신문, 영국 법, 국제법 등을 간단하게 [[중국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한 상황이었다. 이런 준비를 통해 영국의 법률상으로도 외국인 살인이 명백한 불법임을 알고 있었는데도, 엘리엇과 영국 상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에 화가 난 임칙서는 [[포르투갈]]이 소유하던 [[마카오]]에서 식량 공급을 중단해 버렸다. 이에 엘리엇은 항의했지만 임칙서는 "우리는 입항을 거부한 적 없음. 살인범부터 인도하면 식량길을 다시 열어주겠음. 하지만 싫다면 배 위에서 굶어죽거나 말거나 님들 멋대로 하삼."라고 항의를 무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인들의 여러 상선이 식량을 밀매했지만 임칙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묵인했을 뿐이었다. 8월 26일, 임칙서는 [[마카오]]에서 [[영국인]]들을 추방했다. 그 사람들은 [[홍콩]]으로 가서 영국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한편, 영국 상인들 중 일부는 임칙서의 요구를 지금이라도 수용하고, 무역 여건을 보장받기를 원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광저우로 가고자 했고, 이에 초조해진 엘리엇은 11월 3일, '''__아편과 상관없는 영국 상선 로열 색슨 호를 포격__'''해 광저우 진입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청군은 영국 상선을 보호하고자 [[https://zh.wikipedia.org/wiki/%E5%85%B3%E5%A4%A9%E5%9F%B9}|관천배]]가 지휘하는 청의 수군이 정크선 29척을 내보냈지만 당시 청나라의 군함은 급하게 상선을 개조한 배였던데다가 기본적으로 대포가 형편없었기에 영국 배 2척([[https://en.wikipedia.org/wiki/HMS_Volage_(1825)|볼리지 호]]와 [[https://en.wikipedia.org/wiki/HMS_Hyacinth_(1829)|히야신스 호]]) 따위에게 26척이나 격침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이 천비 해전(穿鼻海戰)으로 청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일개 상선 수준의 배에게 국가 해군이 패배하였으니 말이 필요 없는 수준이였다. 그나마 운 좋게 볼리지 호의 돛대에 포탄이 명중하자 만약 돛이 더 파손된다면 주둔지로 복귀하는 시간이 너무 걸리겠다고 판단한 엘리엇이 이쯤 하고 일단 돌아가자고 명령했기에 당장의 전멸만 간신히 피했을 뿐이고, 영국 해군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한다면 탈탈 털릴 것이 뻔했으니 어떻게든 대비를 해야 했다.], 경악한 임칙서는 미국 상인에게 서양 대포 300문과 함선을 즉시 구매하고 주민을 동원해 방어 체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인들은 무역을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임칙서는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종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답변했지만 영국인들은 이 약속이 '불확실하다'고 거부했다. 결국 베이징에서는 영국과의 무역을 종결하라고 하명했고 1839년 12월 6일, 양광총독으로 임명된 임칙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에 반발한 엘리엇과 영국 상인들은 본국으로 가서 영국 정부에 중국과의 전쟁을 제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